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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고등학교와 나와의 인연 2021/04/11
최주수 님의 글입니다.

  진주고등학교와 나와의 인연


  학창시절을 지내본 사람은 그때가 풍요롭거나 힘든 시기였나를 불문하고 청운의 꿈에 불타고 젊음의 이상을 펼치고 희망에 활개를 펴던 고교시절이 가장 그립다고들 한다. 고교를 졸업한지도 육십갑자가 되돌아오니 그 누군들 그립고 추억에 젖어보지 않겠느냐만 나에겐 선대부터 얽힌 과거사도 있었으니... 진주고등학교가 설립된 지 곧 일백주년이 된다고 벌써부터 백주년기념사업회가 활동을 시작하고 있는데 그보다 2년 먼저 설립된 고향의 북천초등학교는 취학아동이 없어 학교존폐도 기로에 서있고 백주년 기념사업을 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선대 친인척과 진주고와의 인연관계를 어름프시 알게 된 것도 고교 1학년 어느 때 인가 싶다.
내가 다녔던 모교인 진주중과 진주고는 그 당시 대개의 학교가 그러하듯이 그달 분 공납금을 다음달 10일까지 납부하지 못할 경우 등교정지라는 처분을 받게 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출결이 정지되어 결석으로 간주되고 간혹 시험기간 중에는 시험지에 등교정지라는 도장을 서무과에서 찍곤 했었다.

중학교 때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고1 어느 기말고사 어느 시기에 등교정지를 당할 처지가 된 적이 있었다. 학교구내매점에서 연락이 와서 찾아갔더니만 매점 주인아주머니께서 어떻게 알게 되었다면서 자기가 서무과에 보증을 해서 일단 문제는 해결되었다며 매점에서 팔고 있는 도너스도 주시면서 가끔 들리라고 하시며 복잡한 친인척 관계를 말씀하셨는데 그 후 계면쩍고 부끄럽기도 하여 일부러 멀리한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주중 때도  덕산고모님과 같이 집안어른들과 같이 뵌 적이 있는 바느질 솜씨가 아주 뛰어나다고 들었던 적이 있는 박씨 아주머니 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진주고 설립기성회 회장이셨던  박재호 공의 따님(선친과 고종사촌)으로 만석꾼 박씨 집안이 농지개혁으로 완전 파산하자 진주고 설립과 집안의 인연으로 진주고내 구내매점 운영권을 제공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 진주고와 진주여고 설립 시 진주지구를 중심으로 경남의 많은 선각자들에 의하여 일신재단이 창설되어 먼저 일신여고(진주여고)가 설립되고 우여곡절 끝에 일 년 후 일제의 농간으로 진주고보가 설립될 때 설립기성회 회장으로 거금을 쾌척하여 활약하신  박재호 공이  본인의 증조할아버지 사위되시는 분으로 할아버지 손위매부로 남매간이었다.
태안박씨 박재호 공은 집안에 서계 박태무 선생 등 많은 학자출신이 있는 명문거족으로 그 당시 진주지역의 만석꾼 대지주로 세거지지는 상까래 마을(진주시 내동면 삼계리)로 지금은 진양호 댐에 수몰되었다. 그의 아들은 박규석 공이며 한때 그들 농지는 서부경남 곳곳에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나의 고향인 북천을 넘어 하동 횡천까지 걸쳐있었다고 들었다. 자유당 정권의 농지개혁법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지가증권의 폭락과 적산공장이나 귀속재산불하 등에 재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여 결국 완전 파산하고 말았다.
할아버지 회갑연 때는 외삼촌 회갑연을 멋지게 축하한다고 진주에서 국악소리꾼과 진주명물 칼춤과 무희, 기생들을 동원하여 고향에서 한바탕 구경 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나의 증조부 되시는 弘字秉字 할아버지는 호는 퇴암으로 천석꾼 성균 진사이었으며 가계를 승계한 할아버지께서는 고향마을에 조상이신 조선조 공신인 죽당 최 탁 선생(소현세자 익위사 익찬)을 배향한 인천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된 후 경인사(경현당)로 복원되는데 힘을 쏟으셨다. 선친께서는 일제강점기 교직에 종사한 관계로 해방이 되자 30세가 되는 해에 초등학교 교장으로 승진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선친께서 북천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으나 625동란 이후 폐교되고 말았다. 교육에 꿈을 가지신 선친께서는 자유당 정권 말기에 그 꿈을 펼치고자 교육자치제에 의한 교직원이력이 있어야 출마자격이 인정되는 등 선거법상으로 이상적인 교육위원이 선출하는 교육감에 3번 연거푸 도전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한표 차이로 실패하는 등 그 꿈을 펼치지는 못하였다. 그 후 북천중학(설립추진 위원장 최용도)은 면민이 뜻을 모아 개설하여 공립으로 개교되었다가 지금은 취학아동 부족으로 폐교 상태에 이르고 있다.
박재호 공께서는 신학문을 하도록 고교설립에 뜻을 두었고 할아버지께서는 유학자로 서원개설에 꿈을 가지신 듯 하셨지만 후학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은 서로 상통하신 것 같았다.
진주고는 일제강점기 설립된(1925) 명문으로 설립은 사학의 민족학교개설을 원하였으나 일제의 장난으로 출발은 여의치 못하여 공립으로 개교되었다, 우리나라 공인된 사회적 지위에서 활동한 출신고교별 인사로 한때는 전국 4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진주고와 나와의 관계는 선친을 비롯한 3대가 교직에 종사하였지만 나와 바로 손아래 동생이 진주고에서 수학한 인연뿐이다. 기별동창회장을 제외하곤 그 흔한 지역별 회장도 수행한 적이 없으며 학교발전에 크게 기여한 점도 없고 축구부 후원금 등 소소한 것 외엔 발전기금도 제대로 낸 적이 없다.
그래도 오다가다 이야기가 나면 진주고 출신이라면 인정해주는 에피소더 하나를 소개하면서 이야길 마무리하고자 한다.
본인은 대학을 수도권대학이 아니고 지방 경상대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초빙된 곳이 지금 그 말썽 많은 진해 웅동중학교 <그 당시 이사장은 조국의 외조부로 계광학원은 1908년 아일랜드인 선교사를 중심으로 창립하여 한때(1919)는  독립운동의 그 지역 중심지로 일제의 탄압으로 1930년대는 거의 폐교되다 시피 하였다. 해방 후(1946) 고등공민학교로  그 후(1952) 면립 성격의 사학개교 시에 지역호족인 박씨 가에서 이사장 수임>이었다.
그 곳에서 농업과 영어를 강의하다가 영어교사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하여 2년 후 공립학교로 진출하게 되었다.
경남교위 교직에 근무할 때도 대학보다는 진주고출신으로 보람을 느낀 일들이 많은 것 같다. 특히 고교재학 시 조금 배운 제2외국어 독일어(김영수 강사, 후일부산대학교 인문사회대학장 역임)로 후일 대학원 진학의 관심으로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 독일어도 기초는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교사가 부족한 학교형편에 따라 특히 제2외국어를 맡을 교사가 부족하였고 재직 시는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를 억지로 맡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간혹 그 시절 제자를 만나면 우리 독일어 선생님이라고들 하는데 나에게 독어를 배워 그 후 독일어를 전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엉터리 독어선생이 아니었나 하고 미안할 때가 많다.

본인이 중등교직에서 10년차 근무로 교직에 익숙해질 무렵 하고 싶은 학문연구에 정진하겠다는 생각으로 교사직을 사직하고 대학원박사과정(원예학)에 입학하여 몰두하게 되었다. 이왕 시작한 학문 더 큰 장래를 위하여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부모님을 더 잘 모시겠다며 당시 진주여중에 근무하는 아내의 권유로 시도한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대학에 진출할 때뿐만 아니고 후일 자연과학대학장으로 추천 임명될 때에도 뒤에 들은 이야기 이지만 이사장님을 비롯한 인사위원회에서 명문 진주고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더 적합하다고 인정되었다니 이래저래 진주고와는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마침 35회 동기들의 졸업 60주년이 진주고 개교 백주년이 됨으로 그 때 동기친구들 축배의 잔을 함께 높이들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의 부르짖음처럼 ‘진고의 푸른 꿈, 세계로 미래로!’를 크게 외치며 탄탄한 모교의 영원한 발전을 기원해 본다.


  신축원단에, 옥당 최 주 수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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