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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병상일지, 그 후 2010/10/28
최주수 님의 글입니다.

아내의 병상일지, 그 후

기축년은 윤년이라 예부터 작정해 왔던 선부군의 묘비제막식을 초여름에 성황리에 마칠 수 있어 자손으로 조상님께 해야 할 일은 거의 하였다는 마음으로 특히 아내의 건강은 조상님들께서 앞으로는 챙겨주시리라는 기대감으로 마음을 다소 편히 가질 수 있었는데 수십 년 전부터 불편하기도 하던 아내의 척추가 다소 불편하다 하여 서울에 가서 MRI 진단을 해 본 결과 큰 이상은 없는 것 같다고 하여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는데 가을부터(2009년 10월) 입맛도 떨어지고 척추 어깨부분에 통증도 조금씩 심해진다고 하여 아주머니로부터 Biofreeze로 맛사지를 매일 받기도 하고 동의의료원에서 매2개월 마다 내과 정기진료 외에 한방에서 침술치료도 하였으나 그렇고 그랬다며 오히려 심해지는 것 같다고 하였다.
연말 12월 중순쯤 재부진주고35회 송년회에 같이 참석하였다가 힘들어 하여 일찍 돌아온 후  연말 무렵(27일) 이벤트로 아들내외가 깜짝 다녀간 후  아내의 건강이 외관상으로 조금씩 회복된다고 느껴 새해 첫 날은 교통이 복잡할 것 같아서 새해 1월 2일 우리나라 반도에서는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울산 간절곳을 방문하여 지난해(11월) 경상대 65학번 모임 시 히트 쳤던 물메기탕 집을 찾아가서 아내도 입맛을 찾았는지 상당히 먹고 활기를 찾는 것 같아  이젠 경인년 새 해 들어 기축의 악재와 해묵은 업장이 모두 소멸되어 건강이 점차로 회복되는가 싶어 같이 즐거워하였는데 3일 컨디션이 별로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괜찮겠지 한 것이 4일 어깻죽지가 째지는 것 같이 아프다고 해서 4일 동네 보람신경외과에 갔다가 뒷날(5일) 동의의료원에 입원해서 검사(MRI)를 해보니 척추염이란다.

척추전공인 아들에게 연락해보니 척추감염도 위험하다면서 서울 삼성병원에 예약되었다기에 7일 밤 퇴원하여 바로 8일 삼성병원에 입원했는데 동의의료원에서 복사해간 영상을 조사 하던 주치의로부터 암이 거의 확실하다든 말을 듣고 핵의학 등 여러 가지 검사결과 청천벽력 같은 위암의 척추전위로 판명 받으면서 “별 치료방법이 없다며 항암진통제나 지어줄 터이니 집에 가서 치료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젊은 여자 담당교수로 말을 들으면서 젊은 사람이 경험이 없어 실력이 모지란다고  믿으면서 7년 전 아내의 위암치료를 하였던 세계적인 혈액종양내과의 권위자인 서울대 방 모교수를  삼성병원의 진단과 영상을 들고 찾아 갔었더니 빨리 옮기라는 말에 서울대 외래교수이고  친구들이 서울대에 남아있는 아들의 노력으로 다음날 바로 서울대에 입원할 수 있어 12회 정도 해야겠다는 치료를 하루 뒤 해외출장이라는 방 교수의 1차 항암치료(1월 15-17일)를 또 한 번 기적을 바라면서 바로 시작 할 수 이었다.  
항암치료가 끝나면 다음 치료 시까지 보통 퇴원해야 하지만 돌아오는 교수님도 뵈올 겸 뭔가 치료 후가 힘들어서 계속 입원하고 있으니 교수님이 돌아와서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폐렴이 왔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시작된 아내의 투지로 한 달간의 힘든 폐렴치료를 하면서 삼성병원에서 팔에 시술한 포트가 막혀 왼쪽가슴에 케모포트를 다시 시술하여(2월 3일) 감염점검을 한 후 다행이도 케모포트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2월 9일 갑작스런 혈압 급강화로 비상이 걸렸으며 방 교수도 아내에게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며 통증이 심하여 신경외과의 신경차단술을 실시하여도 크게 효과를 못 보아 나중에는 진통펌프(fentanyl 150+zofran 8mg)를 설치하였으나 만족스러운 효과를 볼 수 없었지만 morphine 등으로 진통치료를 심하게 하면 산소호흡이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어려움 중에서도 다행히도 2차 항암치료(2월19-21일)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조금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들의 말에 의하면 위암의 재발은 치료가 어려우며 특히 척추로 전이된 것이 최악의 경우라고 하지만 7년 전 투병을 생각하며 마음의 각오를 불태우면서 아내의 투지도 예부터 강하다는 것을 믿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 오드라도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힘을 합해 이겨나갈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아내의 식욕이 떨어지고 체중감소 등 문제가 있어 포트로 영양제를 공급하는 TPN을 실시하여 뉴트리플러스 리피트를 공급하면서 3차 항암치료를(3월 6일-8일)받을 수 있었으며 여러 고비를 만나면서도 통증치료를 위한 신경차단술 통증포트 등을 시술하면서도 옆 병실에서 똑같은 경우로 만난 고교동창생 정 사장(같은 병으로 같은 교수한테 치료하는 환자)보다 치료가 잘되어 간다고 즐거워 할 수 도 있었다.
소망대로 3차 항암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나 아들이 공동으로 경영하는 시너지정형외과병원으로 3월 10일 옮겨서 18일까지  입원하고 있으면서 아내의 옆자리에 침대도 하나 더 가져다 놓는 등 비데가 설치된 화장실하며 서울대병원보다 훨씬 좋은 분위기에서 4차 항암치료를 위한 체력회복을 하는 동안 아내와 아들의 마지막 소망인 어깨의 골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3차례에 걸친 척추뼈땜질(supportive care: vertebroplasty)을 위한 성공적인 수술에 들어갔으나 뼈는 땜질이 잘 되었지만 기대하는 골통증(axile whole spine pain &  scapular pain)은 별 완화되지 아니 하였다. 그 중에서도 통증은 잘 치료되지 않고 때때로 떨어지는 혈압하며 호흡수치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는 아들을 보노라면 나 또한 마음이 편치 아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19일 날 4차 항암치료를 위한 서울대 입원이 예약되어 있어 17일 외래로 혈액종양내과로 가서 혈액검사 등을 실시하였는데 예정대로 19일 입원하라고 하였다. 이번 4차 치료가 잘되어 퇴원할 수 있으면 부산 집에도 다녀올 겸 부산 대동병원에서 다음치료시기 까지 입원하여 회복할 예정으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보통 서울대병원은 입원실 구하기가 어려워 보통 예정 날짜 보단 입원이 늦어지곤 하는데 아들의 부탁으로 마침 2인실이 18일에 나왔다며 하루 먼저 입원하라는 사정이 아내에겐 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담당 방 교수께 사정을 말씀드려 체력회복을 위하여 항암치료를 2-3일 만이라도 늦추지 못했는지 후회되기도 하지만 과연 늦추었으면 친구 정 사장처럼 좀 더 생명을 끌어 갈수도 있었는지 어찌되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후회도 된다.

  3차 항암치료 후 체력회복을 위하여 아들의 병원에서 영양제로 TPN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척추보강시술로 체력이 떨어져 있을 것이지만 아들 병원이라 마음 편하고 조금은 행복하게 느끼는 아내의 회복을 위하여 나의 생각 같아서는 아들 병원에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입원하고 있는 것도 어떤 위급상황이 발생할 지 전전긍긍하는 아들입장을 고려할 때 부담스러워 아들 병원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늦출 수는 없었는데 나중에 4차 치료(3월20-22일) 후 다시 폐렴이 와서 폐렴치료에 몰두하였으나 쇠약해진 체력하며 척추암도 전신에 퍼졌고 호흡지수가 극히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3월 31일 중환자실로 내려가게 되었다.
중환자실로 내려가면서 “집에 가자”는 아내의 목소리와 병실에서 오히려 내가 아내에게 하여야 할 말인 “고마워요” 하는 아내가 내게 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중환자실에 내려갔다가 다음날 기도삽입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는 서로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고 쓸쓸히 그곳에서 가족들의 가슴을 태우는 3주간을 버티면서 하루에 짧은 2회의 면회시간에도 제대로 가족들 간의 사랑의 교감을 이루지 못하고 병실에 다시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대로는 그냥 보낼 수 없다고 매달리는 우리들에게 아내가 하느님 같이 믿는 담당 방 교수도 어쩔 수 없다며 “너무 애착하지 말고 편히 보내드리자”는 위로 겸 경과를 설명할 때는 어쩔 수 없다고 해 놓고 주치의가 폐사진이 조금 좋아졌단 말을 듣고 담당 방 교수를 찾아가서 그대로 보낼 수 없다며 위선 폐렴이라도 좀 치료해 병실에 올라가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기도 하였지만 산소포화도가 계속 떨어지면서 우리들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는 병실로 올라오지 못하고 부산자택을 나왔다가 영영 불귀의 객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 때 같이 치료받던 친구 정 사장처럼 항암치료를 늦추고 잘 대처하지 못한 것이 가슴에 한이 되어 남아 있다(2 달 후 그 친구도 결국 운명).

위급하다고 가능한 가족들이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은 뒤 4월 22일 7시42분 딸과 사위가 부산에서 급히 올라오고 있는 중 도착 30여분 전에 나와 아들과 며느리의 전송 속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아들을 잘 키우고 뒷바라지로 남편을 성공시키고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 바로 세우고 교육자로서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시키고 퇴임 후에는 등단문인으로 활약한 작은 체구의 여장부형 智多 趙末順 선생의 생애가 가족과 친척 친지들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막을 닫게 되었으며 운명 후 눈물로 부산 동의의료원 장례예식장으로 이동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애석함과 가족들과 친한 친구와 제자들의 눈물 속에 죽음을 전혀 예기치 않고 떠났던 자택을 발인 일에 주검으로 둘러보고 종신반장으로 많은 수고와 봉사를 한 우리라인의 주민들의 정렬된 영결을 받으면서 25일 8시 30분 정들었던 부산 안락동 S.K 아파트를 뒤로하여 후손들을 위하여 리모델링에 크게 투자하였던 북천 고향옛집도 11시경에 영정만이 둘러보고 고향 남포마을회관 앞에서 노제를 마지막으로 하동 북천 고향 선산에 마련된 영원한 안식처에서 후일 언젠가 본인을 위한 옆자리를 남겨두고 편안하게 먼저 잠들게 되었다.

그 후 본인의 2회에 걸친 대동병원 입원으로 체력이 거의 회복되고 건강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으면서 이번학기 휴직으로 외출도 삼가며 집에서 아직도 슬픔에 쌓여 하루 한번 씩 지장경을 읽으면서 친구들과 친지들의 위로를 들으면서 아내에 대한 한스러움에 눈물 맺힌 세월을 보내고 있다.
사망 한 달 내에 마쳐야 한다는 사망신고서를 5월19일 하러 가면서 아내의 눈물인지 그    날 따라 억세게 쏟아지는 비 때문에 포기하고 다음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면서 내손으로 신고를 마쳤다.  
그 후 조금은 인연이 있는 고향 북천의 북암사에서 49재를 모시면서 벌써 5재를 마치는 세월의 빠름과 인생무상을 생각하면서 문득문득 아내 생각에 아내의 극락왕생을 위하여서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는데도 때로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면서 아내에 대한 한과 그리움을 달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49재가 끝나면 훌훌 털고 아내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슬픔을 잊어야 한다지만 과연 내 생애에 먼저 떠나간 아내를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아내여! 부디 극락왕생하시고 하늘나라에서나 우리들을 잘 지켜봐 주시길 엎드려 간청합니다.

   - 경인년 5월 말에,  당신을 말없이 정말 사랑했던 남의 편 노릇만 했던 남편이-

최주수 아내가 하늘나라로 간지도 반년이 흘러갔습니다. 나에게 시련을 주고 떠나간 아내가 때론 눈물겹도록 그리워지기도 하고 때론 많은 눈물도 흘리곤 하였지만 아내의 명복을 빌며 소설의 주인공처럼 용감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외에도 아내에게 써둔 글들을 시간나는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에게 많은 성원과 격려를 보내주십시요 . 건강이 제일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두들 건강히십시요. 최주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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