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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과 함께 가시는 님 보내면서 2017/10/17
최주수 님의 글입니다.

추석과 함께 가시는 님 보내면서

  관습은 시대에 따라 변화기도 한다지만 추석이 다가오니 앞으로 조상 산소벌초가 마음에 걸린다. 얼마 전 왼쪽 갈비뼈에 약간의 통증을 느껴 병원에 검진을 하니 충격으로 왼쪽갈비뼈 9번에 금이 가는 골절로 조심하란다. 이번엔 추석 전부터 긴 연휴가 시작됨으로 서울동생과 같이 추석 바로 전에 시행하기로 한 벌초를 난 별로 도움도 못된 채 겨우 예정대로 시행할 수 있었다.
  추석절사에 참여한 바로 아래 동생이 일전 서울에 가서 매형을 뵙고 왔는데 두 번째 심장수술을 하여 서울대 중환자실에 입원중이라고 하였다. 추석 뒤 조부의 기제사를 모신 후에 문병 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내도 누나로부터 회신도 없었다.
  추석뒷날 지인과 술 한 잔 나누고 있는데 서울동생으로부터 매형이 오늘 내일 위급하다는 전갈을 해왔다. 또 몇 시간 뒤에는 운명하셨다고 서울 여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다음날 오전 고속버스표를 간신히 구하여 강남 터미널 뒤편 서울 성모병원에 도착하니 15시가 지나고 있었다.  매형이 별세하기 얼마 전 자녀들 불러놓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임종세례를 받아 장례식 절차가 기독교식 위주로 진행되었다.
고인에게 메를 올리는 대신에 기독교 예식에 내가 나설 자리가 없었다. 또한 모레 글피가 조부 기제일이라 입관 하관 등은 참례 않는 것이 우리 가문의 전통 기안(忌案) 방식이다.
  우리네 전통방식으로는 초상 시에는(조. 부모상 3~7일장)가정에 빈소를 차려놓고 상주나 친인척, 지인들이 수직이라 하여 빈소를 지키며 차례로 향.촛불을 꺼지지  않도록 계속이어 분향하곤 하였다. 탈상 때까지 조석으로 메를 올리며 소상, 대상(3년상)까지 계속하여 치르기도 하였다.  저의 조부상은 7일장으로 참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유교전통 가정은 거상 중에 시묘를 행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관습은 시대변천에 따라 개선되어 사라져갔다. 이제는 장례예식장 측에서 자정이 지나면 문상도 삼가 하도록 하고 상주들도 쉬게 하며, 친인척도 가정이나 연고지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오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새벽녘에 부산에서 사위가 도착한다는 것도 알면서 도곡동 아들집에 잠시 쉬러갔다가 손주녀석도 보고 아침식사도 하고 왔다. 12시에 발인예배로부터 예식을 멀리하고 난 조부기제사를 핑계 삼아 운구에는 참여치 않고 하부하였다.  
  고인이 된 매형은 진주고 7년 선배로(1958년 서울대입시 전체수석과 공대수석을 한 두 사람 전설적인 28회)마침 장례식장에 조문오신 수석의 주인공 강인호 선배님을 비롯한 많은 분을 뵐 수 있었다. 또한 존경하는 정석희 고향선배를 잠깐이나마 뵐 수 있었고 바쁜 와중에 충남 아산사에서 일부러 와서 빈소에 문상만 드리고 곧바로 떠난 옛 친구 정담스님은 아마 매형의 입교에 다소 의외라 생각하였으리라 사료된다.  
  자유당정권시절 수년간에 걸친 농지개혁법의 제정과 시행(1949~1953년)으로 자가 경지면적 3정보를 한계로 그 이상은 소작인 등에게 경지를 넘겨주게 되는 특별법이 무리하게 시행되었다. 성균진사이셨던 증조부를 계승한 천석꾼 할아버지께서는 육이오 와중에 약삭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여 농지를 거의 모두 빼앗기게 되었다. 그 여파로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봐 선친께서는 교장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들어와 면장을 하시면서 조상님 제사도 모시고  할아버지를 봉양하시게 되었다.
  가계가 다소 안정되자 자유당정권 때 시행된 그 당시 금권선거로 악용하기 쉬운 법률이론상으론 훌륭한 교육자치법으로 교육위원에 의한 교육감 선거에서 선친은 교육위원을 거처 여러 번 도전하였지만 실패하게 되어 그나마 남은 재산이 파산에 가까워 가정경제가 매우 어려울 때 우리들의 학창시절이 시작 되었다.

  누나는 중등학창시절 진주에서 나를 보살피며 자취를 하기도 하였느데 철부지인 나는 애를 많이 먹이기도 하였다. 간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누난 보건소(하동군)에 취업이 되었다. 그때 매형(연인)은 경희대를 졸업하고 사회초년생 은행원으로 하동읍에서 도정업을 위주로 여러 사업을 크게 하시던 부친에게 사업상 문제가 생겨 정리해결을 위하여 고향 하동읍에 잠시 와있었다.
  그 당시 대학초년생인 본인이 참석하여 누나의 동기인 김 민자 누님(경남도청근무)과 같이 섬진강 건너 돈박골에서 식사를 한 것이 나와의 인연의 첫 대면이고 그 때 강변에서 매형은 “oh danny boy" 불러 인기를 얻었다(?)고 생각된다.
  그 후 누나는 서울에 교육출장 갔다가 기회가 되어 서울시 공시에 합격하여 서울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 때 학생대표로(경상대 총학생회 부회장) 대학친선대회나 중앙정보부반공교육 및 산업체홍보 방문교육 등으로(공화당정권  때 대학생 데모유화책?)서울에 출장가게 되면 누나랑 매형도 교육장에 방문을 해서 내 식욕에 감탄도 하면서 맛있는 것도 사주시기도 하였다.
  
  그 어느 날 마침 고향집에 있을 때 예기치 아니 하였든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아버지께서는 집안 경조사로 출타중이셨는데 매형의 부친 되시는 분(박 기태 사장어른)께서 청혼 차 직접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부스러기과자와 소주 밖에 없는 동네 점방에서 사장되실 어른신과 내가 주고받는 결혼이야기와 과감 없는 어려운 현 실정을 이야기 한다고 모두다 술이 취할 정도 이었으니! 다음번에 다시 방문한 사장어른과 할아버지의 반대로 일본식으로 개명하지 않아 하동국민(초등)학교에서 .어렵게 교직의 첫발을 내디디신 선친께서는 오랜 지기나 되신 것처럼 같이 한 잔 나누시고 헤어질 때는 서로 포옹까지 하셨다.  
  사전 결혼준비도 없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혼인 날 받은 규수는 혼자 움직이는 예법이 아니라면서 아버지의 지시로 누나를 모시러 추운 겨울 서울에 갔었다.    지금처럼 통화수단도 좋지 않아 서로 어그러져 누나는 고향으로 출발 했었고 맹추위에 연말이라 특급도 아닌 전라선 열차로 겨우 내려오면서 구례구역(求禮口驛)에 내려 택시로 구례 고모 집에 들러오던 내 혼자의 생각과 공상들... 이제는 기억도 흐려져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그 당시만 해도 신부 집 마당에서 구식혼례식이 행하여지던 때 하동읍 농협회의실에서 정 원용 교장님의 주례로 신식결혼식을 마치고 결혼당일 매형 친구들 덕분에 많은 자가용 지프들이 북천 남포동에 왕래한 사실하며... 우리 집 피로연 잔치에서 종근, 낙진이랑 내 친구들 심부름 한다고 수고 정말 많았었다. 거의 파산한 종가댁 살림이지만 음식은 유과, 전과, 다식, 양갱, 엿 등 전통한식(어머니 외숙모인 악양 만석꾼 취간정 안주인 솜씨 등)이 궁중음식 같아 놀랍다는 감탄 등도 기억난다.

특히 지금도 종근이 친구는 기회되면 선친의 멋으로 회자하고 있지만  그날 고향집에서 피로연이 끝나고 밤이 이슥해지자 장난기도 발동하여 닭장의 토종닭이나 한마리 푹 삶아 피로회복겸한 우리집 어머님으 전통탁주 한잔 하자는데 의견 일치하여 집안 동생뻘 되는 낙진이가 선봉장으로 나무로  불을 때면서 서투른 부엌에서 양념도 찾아가면서 거의 작업이 완료되었을 때 사랑채 옆방에서 주무시던 선친께서 소변이 마뤄웠던지 깨어나셔서 우리들을 보시고 "그 것 참 멋지다, 나도 한 구미(몫) 끼워달라" 하시던  그 말씀이  꾸중하실줄 알았는데  나이가 든 지금 생각해도 너무 멋졌다고  최근의 어느 자석에서도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매형과 나는 그 후에도 많은 인연이 쌓여왔다. 그 당시 카메라가 귀하든 시절 자형이 아끼던 캐논 데미카메라를 빌러 와서는 돌려주지 아니하고 쓰다가 아래 동생이 잡혔던 것을 겨우 찾았지만 그 후 돌려주지 못하고 어쩌다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누나 체면이 얼마간 훼손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매형은 귀공자 타입으로 원래 다소 약골이며 자상하면서도 실리적이고 세부적인 사실등도 많이 알고 있는 매사에 빈틈없는 형으로 중년기 이후 의지력은 강하지만 병치레가 많은 편이었다.  
  특히 아내에게 전이된 암이 재발하여 서울대 중환자실에 있을 때 할 일 없이 하루 종일 혼자 대기실에 기다리는 내 모습이 애처로웠든지 시간되면 자주 찾아와 서울대병원 앞에서 막걸리 한잔씩 나눠며 위로해 주신 기억이 새롭다.
   처조카인 유경이의 대학입시 미술실기시험엔 모교라며 이젤을 좋은 자리에 잡는다고 부산을 떨기도 하였고 우리내외의 문인 등단기념행사 뿐만 아니라 곤지암 등에서의 집안행사에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어주시기도 하였다.
  생전에 선친께서 간혹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가실 때에는 애주가 장인어른 오셨다고 술대접을 철저히 하시면서 한자리에서 청주반병은 거뜬히 하시더라 면서 나를 비롯한 우리가계의 주량과-정말 지금도 우리 모두 흠모하고 있는 아버지이시지만-유머를 갖추신 선비 같은 풍류의 주량이 대단하시더라고 감탄을 하시기도 하셨다.

  누나가 간호학을 전공하였고 서울시 보건복지 담당관으로 근무할 때 동의대 간호학과에서 ‘개호간호’ 특강을 하기도 하였고, 서울시내병원 등의 사정과 인맥을 꿰뚫어 보고 알고 있었다. 또한 사위와 처조카 등이 의사였기에 백세인생이란 현 시점에서는 다소 짧은 것 같기도 하지만 매형은 말년에는 사업도 정리하고 고교동기들과 부부여행이나  즐기면서 그런대로 자기의 수(79세)를 누릴 수 있지 아니 하였나 사료된다.
   이제 누나도 우리나라 관습상 자녀들에 대한 권위도 점차 위축될 것이고 지금세상은 며느리가 시어머님 눈치 보는 세상이 아니고 시모가 며느리 눈치 보는 세상으로 바뀌어가니 변호사인 며느리와 소통과 화합하면서 개종한 종교적인 갈등 문제도 없이 가내에 행운이 전승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어차피 인생은 한번 태어났다가 잠깐 머물다 가는 인생 아니더냐?! 인생오복의 마지막은 고종명이니 고생 없이 한을 남기지 아니하고 깔끔하게(?) 떠난 매형은 다소 서둘러 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삼성의 이회장님보다 오복의 축복을 더 갖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후일 저승에 가서 서로 만나면 매형은 기독교세계에, 그래도 필자는 불교사바세계에 기반을 두고, 다시 만나 탁주 한 잔 들면서 이야길 나누도록 합시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정유년 한글날에,  옥당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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