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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투병기 그리고 그후...
 흰나리  | 분류 :   | 2010·07·03 23:20 | HIT : 1,681 |
2010년 4월 22일 (음력 3월 9일) 저녁 7시 42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향년 62세의 이른 나이로 저의 장모님이신 조말순 여사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8년전 위암 4기 진단 이후 위 전체를 절제하고 힘든 항암치료의 과정을 이겨나가며 5년이 되던 해, 서울대병원에서 위암의 완치를 선언하며 더 이상 서울에 오지 말고 부산에서 매년 건강검진 정도만 하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만 해도 불과 3년만에 우리 가족에게 이런 큰 아픔이 생길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인명은 재천인지 건강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환자는 아니셨던 장모님을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서방, 고맙네. 이서방, 고맙네. 이서방, 고맙네. 이서방 고맙네."
서울대병원 125병동에 입원해 계시는 장모님을 만나뵙고 부산으로 오는 KTX가 막 대전쯤 지났을 무렵 핸드폰이 울려 발신자를 보니 장모님 전화번호였습니다. 전화를 받고 여보세여 하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고맙네" 하시는 네번의 말씀이셨고 침묵이 잠시 흐르기에 어서 힘내시고 건강하시라는 말씀을 드리며 재민엄마한테 전화를 주었습니다.
1월초부터 거의 매주말 장모님이 계시는 서울을 다녀왔지만 본인이 힘드신 탓에 4월까지 한번도 전화를 주시지 않으셨던 장모님이시기에 처음으로 받는 그 전화가 반갑고 나 역시도 고맙긴 했지만 왠지 모를 불안함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장인어른의 손을 잡고 병동 복도에서 걷기도 하시고, 식사도 곧잘 하신다기에 별 일 아니겠거니 했는데 며칠 후 장모님이 중환자실로 옮기셨다는 얘기를 처남한테 전화로 전해 들었습니다. 결국 부산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들었던 그 네번의 고맙다는 인사말이 사위가 장모께 들은 마지막 말이고, 목소리인지라 결코 장모님께 고마운 일을 한 적이 없는 사위는 장모님과의 마지막 통화가 생각날 때마다 더더욱 미안하고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교직생활을 오래하셔서 늘 오른쪽 어깨죽지가 아프셨던 장모님이셨고, 평생 지병이라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하도 어깨 뒤가 아프다 아프다 하셔서 동의대 병원에서 MRI를 찍은 후 혹시나 패혈증이 우려되어 뼈 속 염증치료를 위해 서울삼성병원에 갔습니다. 하지만 하나 둘씩 검사 결과가 나타날수록 그 결과들은 두려움과 절망만을 안겨 주는 것들이었는데, 결국 "위전이 골수암"이 아니길 바랬던 마지막 희망마처 앗아가버린채 장모님은 "골수 전이 위암 말기" 진단을 받으시고 또다시 힘든 투병 생활,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8년전, 15%의 생존확률과 85%의 사망확률로 살 확률이 죽을 확률의 1/5도 안되던 그 때, 장모님을 살려주신 방영주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을 다시 찾아가 장인어른과 처남이 다시 한번 기적을 만드는 치료를 해 주십사 하며 눈물의 부탁을 드리고, 방교수님 역시 " 말순씨, 왜 또 왔어?" 하시며 세계최고의 위암치료 의사답게 희망과 함께 예의다른 관심을 가지시며 장모님의 치료스케줄을 잡으실 때만 해도 우리 가족은 방교수님이 우리 장모님을 다시 한번 더 살려주실거라는 것을 절대 믿어의심치 않았습니다.

100여일간의 투병기간 동안, 정말 글자 그대로 사투(死鬪)를 벌이며 하루 하루 더 힘들어하시는 장모님을 장인어른과 재민엄마, 처남, 그리고 나와 처남댁까지 우리 온 가족은 물론 이 세상에서 덕을 베푸시며 살아오신 장모님을 아시는 많은 분들이 같이 기도하며 염원했지만 어느 누군가의 말씀처럼 하늘에서 더 하실 일이 많으셔서 조금 일찍 모시고 간 것인지 우리 장모님은 서울대학교 병동에서 중환자실로 옮기신지 2주일 정도가 경과한 시점에 운명을 하셨습니다.

장인어른과 처남의 전화를 받자 말자 재민엄마와 함께 서울로 가는 KTX를 탔고, 서울역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가는 택시를 타고 10여분이 지나 장모님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20분만 더 기다려주셨으면 딸과 사위도 임종을 지켜드릴 수 있었으련만 뭐가 그리도 바쁘신지 그 20분을 더 못참으시고 그리 가셔야 하셨는지..


부산으로 내려오는 앰뷸런스 안에서 장모님은 말없이 조용히 누워계셨습니다. 여전히 몸은 따스하고, 부드러웠고 그런 장모님 곁에서 재민엄마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엄마에게 못하한 말들을 도란도란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재민엄마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가 싶더니 앰뷸런스 앞에서 말없이 조용히 계시던 장인어른도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저녁 9시에 서울대병원을 출발한 장모님과 우리 가족은 살아 생전 장모님이 그리도 가고 싶어하셨던 부산 땅을 새벽2시쯤에 망자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호상도 아닌데 작은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는게 도리인 것 같다 라고 장인어른이 말씀하셨지만 엄마의 죽음이 못내 아쉽고 답답하기만 한 아들과 딸은 살아 생전 엄마에게 잘 못해 드렸고 또 엄마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편하게 앉아서 엄마를 기리고 얘기하실 수 있도록 좀 넓은 곳으로 빈소를 잡는게 좋겠다 해서 결국 특실에 빈소를 마련했습니다.

허둥지둥 전혀 준비되지 못한 초상을 치뤄야하기에 분주하기만 하고 할건 없었던 밤이 새고 아침이 되자 여기저기서 근조화부터 도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모님 가시는 길에 조화가 너무 없어 서운해하실까 하는 걱정도 했지만 빈소 입구를 꽉 채우는 수많은 근조화와 그 진한 국화향기는 우리의 우려와 걱정을 기우로 날려버렸고, 금요일 오후부터 한두분씩 오시기 시작한 문상객도 정말 이렇게까지 우리 장모님이 덕을 많이 쌓고 지내셨구나 알 수 있을만큼 많으셨습니다. 결국 옆의 비어있는 빈소까지 잠시 빌려가며 금요일, 토요일을 상주로서 문상객들을 맞이하다보니 정말 잠시 잠깐 사이처럼 시간은 흘러가 버렸습니다.


“말순아...!!!” “조선생...!!!” “선생님...!!!” “반장님…!!!”
입구에서부터 오열을 하시며 들어서시는 분들 중에서 우리 장모님의 죽음이 너무 아쉬워 정말 쓰러질듯이 눈물을 흘려주신 장모님의 친구분들, 사회생활을 하시며 아시게된 분들, 그리고 제자들, 또 종신반장으로서의 장모님을 기억하시는 아파트 주민들 등등, 많은 분들이 정말 다양한 장모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서로 다른 이름의 장모님을 불렀고 그 분들에게 결코 답할 수 없는 장모님 대신 우리 자식들이 같이 울고 곡하며 내 어머니의 죽음을 저리도 안타까워 해주시는 분들에게 정말 가슴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출상을 하며 이젠 정말 장모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월요일 아침, 우린 100여일간의 서울에서의 투병기간 동안 장모님이 정말 그리도 가고 싶어하던 집으로 갔습니다. 살아계신 모습이 아닌 영정사진과 혼백의 모습으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벌써 우리 눈엔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고 집에 들어가서 나오는 동안은 너무 서럽고 안타까워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도 예뻐해주시고 사랑해주시던 재민이의 작은 가슴과 손에 안겨 우리들 앞에서 집을 돌아 나오시던 장모님의 영정사진도 내가 왜 이런 모습으로 집에 왔나 하시며 우시는듯 했고 그래서 더더욱 너무 일찍 보내드린 것이 너무 한스럽고 미안해서 우리 모두는 죄스럽기만 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주민들께 목례를 한 후 아파트를 돌아나오는데아파트 주민들도 우리 장모님께 목례를 하며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은 “아, 저분들도 나오셨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장의차 운전하시는 기사님이 어떤 아파트는 입구에서부터 장의차를 못들어오게 하는 아파트도 있고, 또 주차난 때문에 대부분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영정과 직계가족만 집에 다녀오곤 하는데 이 아파트는 참 대단하다 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경비아저씨가 반장님 오실 시간 됐다 싶어서 일일이 차를 지하로 다 빼시고, 또 누구 하나 부르는 사람이 없어도 그 길가에 그리도 많은 주민들이 나오셔서 떠나시는 장모님을 배웅해주셨다 합니다. 살아오시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시고 덕만을 쌓다 가신 분처럼 우리 장모님도 그렇게 살아오신 걸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일찍 이세상을 떠나가신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거인이신 우리 장모님이 안타깝고, 또 애처롭기만 했습니다.


하동 북천에 도착해 노제를 지낸 후 처남 친구와 선후배들의 운구로 우리 장모님이 남포부락 선영의 산소에 누우셨습니다. 황토흙이 곱기만 한 그 양지바른 땅에서 이젠 아프지 않으시고 편안히 쉬시기를 진심어린 마음으로 기원하며 장모님을 묻어드리고 오는데 생전에 그리도 많이 아프셨기에 이젠 더 이상 아프시지 않으셔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쩌면 우리 장모님이 편안하시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종부로서, 그리고 해외유학중인 남편을 뒷바라지한 헌신적인 아내로서의 조말순님.
누구보다도 엄하시면서도 많은 즐겁고 행복한 추억과 기억들을 안기며 훌륭한 사회인이 된 아들, 딸을 길러내신 조말순님.
아들, 딸이 더 좋은 걸 알지만 그만큼이나 며느리와 사위를 배려하고 이뻐해주신 조말순님.
몸이 안 좋아 늘 쓸쓸히 집에 계시면서 개구쟁이고 말성꾸러기인 외손자 재민이를 정말 끔찍히고 아끼고 사랑해주신 우리 장모님이신 조말순님..
이런 우리 장모님이 이젠 영면에 드셨습니다.


몸이 좋지 않으셨고 막연하게나마 그때쯤 암이 재발했겠지 하며 생각하는 작년 가을 이후부터 너무 많이 외롭고, 너무 많이 아파하셨을 우리 장모님은 참 작고 갸날프고, 재민이 말처럼 걸음도 로봇 같은 약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상례를 지내면서, 그리고 49제를 지내는 요즘, 또 앞으로 문득 문득 생각나면 기억하고 또 기억할 우리 장모님은 결코 작은 분이, 역한 분이, 아프신 분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세상을 치열하고 열심히 사신 분이시고, 또 약한 몸 속에 더 큰 인내를 가지고 고통과 아픔을 참아 넘기신 분이시고, 가족 뿐만이 아니라 장모님을 아시는 모든 분들에게 존경 받아 마땅한 삶을 살아 오신 크나 크신 거인의 몸과 정신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 장모님은 떠나가셨지만 우리 재민이가 아주 많이 커서 재민이의 손자에게 외할머니 자랑을 하는 그 때까지는 우리 장모님은 우리 가슴 속에서 우리와 함께 심장박동을 나누고 호흡하며 살아계실겁니다.

“장모님, 아프시지 마시고 편히 쉬세요.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장모님…!!!
  














어머니께서 서울대병원병실에서 투병중이실때 절친이셨던 배선생님과 통화하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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