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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려져 가는 세시풍속 2011/02/03
최주수 님의 글입니다.

         흐려져가는 세시풍속

   설날이 다가온다고 손가락 꼽으며 기다리던 50년대 초등학교 시절 설빔으로 마련해둔 새옷과 새운동화(검정고무신을 주로 신든 시절)를 한번 입어보고, 신어본 후 머리맡에 두고 잠자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인생 황혼기에 접어드니 세월의 빠름을 탓해 무엇 하리!
우리가 어릴 때는 가족이 모여 사는 대가족제가 일반적이었으며 특히 우리집은 가묘(家廟)를 모시고 있는 종가였으니 명절 때가 되면 집안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손님들이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찾아뵈었기에 시끌벅적하기도 하였다.

해방과 한국동란 이후 모두들 살기 어려운 때이었음으로 명절 때나 되어야 모처럼 떡은 물론이고 쌀밥과 맛있는 고기반찬을 먹던 시절이라 설명절을 기다리기도 하였지만 국가에서는 물자절약과 검소한 풍토를 만든다고 이중과세를 억제하고 양력을 기준으로 하는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 간다고 구정을 공휴일로 인정하지 아니하였기에 학생들은 등교도 하여야하고(중고교 시절은 진주 하숙집에서)공직이나 직장인들 거의 다 형식상 근무를 해야 하는 사정으로(대부분 10시까지 출근ㆍ등교) 대부분 전통적 가정에서는 구정으로 차례를 지내므로 문제점도 많았지만 70년대 구정이 경조일(敬祖日)이라는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우리 풍속이 조금은 빛을 보게 되었고 이제는 설명절로 정착은 되었지만 그나마 세시풍속을 찾는 사람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세태라 쓸쓸하기만 하다.

섣달그믐날 저녁은 새로운 밝은 세상과 토신들의 활동을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사당은 물론이고 뒷간, 소마구간, 고방, 부엌 등 불 밝힐 수 있는 곳은 훤하게 기름종지에 불 밝히기를 하였다. 그믇날 잠들면 게을러지고 눈썹이 희여진다고 하여 어른들은 동네 사랑방에 모여 세투(歲鬪)놀이를 하기도 하면서 새해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나 또한 아내와 같이 명절 때 가서는 화장실 가기 무서워하는 아내만 고향집에 두고 동네 사랑방에 가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러 놀았으니 아내는 얼마나 심심하고 황당해 하였을까?!
아내 떠난 지금 생각해 보니 나 또한 죄송하고 황당하다.

  그 당시는 장난감을 사기도 어렵고 파는 곳도 별로 없어 모두들 윷놀이, 연날리기(방패연, 문어연), 스케이트, 자치기, 팽이치기, 활쏘기, 딱지치기, 제기차기, 구슬치기(굴밤치기), 널뛰기 등은 선배나 친구들과 어울려 밖에서 모닥불 피우면서 새옷에 불구멍이라도 나면 엄마한테 혼나면서 또는 머슴사랑방에 모여 직접 만들어서 사용하기 때문에 서툴더라도 애착심이 더 가기도 하였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연은 달집에 태우는 등 대부분의 풍속놀이는 접고 아이들도 일상에 복귀하였다.
부모님들도 명절 전부터 각자 형편에 따라 명절준비를 하는데 우리집은 가문의 전통이고 솜씨 좋은 엄마의 특기인 유과(집안 잔치 때는 부조로 만들어 주는 것이 일상), 강밥, 정과, 약과, 송화가루로 만든 다식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집 제주로 만들어 쓰였던 솔잎동동주 중 청주는 당시 우리집 도우미로 엄마의 솜씨를 이어받아 지금은 우리고을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실정이며 이른 봄에 딴 솔잎과 소주로 만든 솔순주는 지금도 내가 한번씩 만들기도 하는 좋아하는 술이다.

우리집은 동성부락의 종가였기에 먼저 제사를 모시고 각자 자기집으로 가서 제사를 모셨으므로 우리는 보통 명절때는 작은집으로 해서 순서대로 세곳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후 가까운 곳 산소성묘를 하고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하였는데 그 당시는 세배돈은 어쩌다가 도시에 나가 있는 잘 나가는 좀 젊은 아재들에게서 재수 좋으면 얻기도 하였지만 고향의 어른들께는 꿈도 못 꾸었고 그저 술이나 떡 그리고 과자 정도 얻어먹고 덕담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옛날 풍속으로 노인은 본집이 아니고 밖에 나가서 과세하면 회춘하시고 수명이 길어진다고 하여 조부께서는 경현당(소현세자 익찬사로 청국에서 귀국길에 사망하여 우리 동네에 인천서원이 건립되어 배향되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공이 많은 몇 분 조상님과 인척으로 걸리는 타성 공신을 모신 재실로 도지정 문화재)으로 과세하시러 때론 가심으로 그 때는 제사모시고 바로 십리길 세배 드리러가서 집으로 모셔와야 하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 동갑내기 삼촌과 모시러 가면서 입이 튀어 나와 쌍소리를 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풍속도 많이 바뀌었지만 내 주성(酒聖)에 가까운 음주실력이 그렇게 싫어서인지 제사 때 어머니께서 제주 만들어 가지고 오시는 것도 싫어하더니만 말년에는 제주 비법을 좀 배웠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적도 있었고 그래도 종부(宗婦)랍시고 산적(散炙) 등 전통 제사음식과 특히 윷놀이와 세투(고스톱) 등 놀이거리로 전통을 조금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한 아내도 지난해에 승천하였고 풍속을 지키려는 인걸도 사라지고 없어지지만 아직도 고향에 남아 있는 우리 마을 대보름 <달집짓기>는 고향 북천의 대표적 세시풍속으로 고향을 찾아들게 하지만 점점 대보름 출향인사의 귀향이 뜸해지고 있으니 달집을 태우면서 상대 부지깽이(달집에서 큰 중심이 된 대로 된 부지깽이)챙기려는 옥동자 점지를 기원하는 새댁들도 향토에서 점차 사라지니 전통적인 세시풍속도 많이 사라지고 변화되겠지만 조상숭배와 고향을 사랑하는 풍속은 전승되기를 기원해 본다.  
    
           경인년  세밑에서  최주수 찬


최주수 정월대보름날 복조리에 오곡밥 얻어먹는 풍속과 달집짖는 풍습이 점차 흐려져가고 그해 여름철 잘 보내려는 "더위팔아먹기" 이벤트도 점차 사라져 가며 아내 떠난후 느껴지는 쓸쓸함과 지내기 어려움이 세시밑 보내기가 더욱 빛을 잃으니 이웃과의 정을 나누기도 힘들어 집니다.
주위분들과 지인들 모두 신묘년 새해에는 더욱 강건하시고 하시는 일 만사형통하시길 기원합니다.
조상님께 대한 차례와 아내에 대한 첫설 차례를 지내고 마음이 울적해져
신묘년 설날에 옥당 최주수 꾸벅 절올립니다. 건강하십시오

2011/02/03 - 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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